교회를 다닌게 아니라 문화센터를 다녔다니..

제가 기억할 수 있는 나이부터 가정의 불화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일방적인 어머니를 향한 미움과, 불만과 폭행은 끊이지가 않았고, 급기야 제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어머니를 내쫒고 강제로 이혼을 하셨습니다.

이러는 과정 가운데 저와 제 동생은 친조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고, 어머니와도 만날 수 없도록 협박을 당하였습니다. 다행히 조부모님들은 좋은신 분들이고 저희들을 사랑으로 대해주셨지만 손길이 많이 가는 학생인 저희들을 돌보시기에는 연세도 있으시고 여러 가지로 힘든 부분이 있으셨습니다.

중학교는 그럭저럭 다녔고 고등학교에 올라갔는데 아버지는 갑작스레 재혼을 통보하시며 결혼하여 따로 사셨고, 어머님은 너무 비참하게 사시다가 암으로 투병하시다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까지 그야말로 최악의 시간들을 보내면서 급기야 자살 시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교련책에 수면제 치사량이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약국에서 치사량 이상의 수면제를 조금씩 모아 죽기로 작정을 하였는데,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기 위해서는 물도 많이 마셔야 하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고, 마시다 도저히 배가 불러 치사량까지는 먹지 못하고 병원으로 이송되어 위세척을 하고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온 저에게 저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미움과 증오와 불평들로 ‘난 정말 악인이다’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도대체 사람들은 결국은 죽을 건데 왜들 열심히 사는지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며 한국외국어대학을 들어갔으나, 내가 원하는 대학도 학과도 아니었기에 유학을 가기로 하고 미국의 한 주립대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고 이 지긋지긋한 가족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공항에서부터 친절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났고, 그분들의 따님을 통하여 공항에서부터 도움도 받고 바로 교회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유학생들의 토요찬양모임이 있었고, 그 모임을 통해서 알게 된 한 언니가 인도하는 성경공부팀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저를 너무 사랑하셔서 저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그냥 믿고 싶었습니다. 나를 너무 사랑해주시는 분이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이 제 마음 가운데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언니가 사영리로 저의 구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 토요찬양모임은 잔잔히 찬양 부르고, 교제하고 기도하는 모임으로 지금도 그 때가 너무 그리울 때가 많습니다. 그 때는 성경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았기에 졸업을 하면서 제 전공과는 상관없는 크리스천 대학, Wheaton College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같이 상처받은 사람들의 아픔을 위로해주고 치료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전공과 상관없는 심리학을 공부하겠다는 저보고 미쳤다며 경제적 지원을 끊으셨고, 저는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그 당시 청년들에게 인기였던 온누리 교회에 무작정 나갔고, 나의 모든 생활을 교회에 맞추며 살아갔습니다. 거의 일주일 내내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한 NGO 기관에 취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기대와는 달리 NGO 단체 내의 권력 다툼과 부정부패에 저는 죄절했습니다. 그 당시 온누리 교회는 문어발식 지역교회 확장에 심혈을 기울였고, 청년부들도 너무 인원이 많아 토요 예배팀과 주일 예배팀으로 나누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청년부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져 지역 온누리교회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직 일대일 양육도 못받았고, 준비도 안되었는데 무조건 가서 제자를 삼으라니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당시 일대일 양육은 양육자 부족으로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지만, 꼭 받아야만 할 것 같은 마음에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생명의 삶 QT도 했지만, 성경 말씀보다는 ‘성령의 바람 부흥’을 강조하던 때였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녔지만 뭐가 뭔지 다시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새벽기도, 금요철야기도회를 나가도 주변에서 다들 하는 방언 기도도 안나오고, 성령이 임한 건지도 모르겠고, 찬양을 열심히 부르지만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것 외에, 그 당시 교회에서 말하는 성령의 바람인지는 느껴지지도 않고,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저에게 고모는 소개팅을 주선했고 교회는 나가지 않지만 술도 담배도 안한다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교회는 나가지 않게 되었고 7-8년을 지금 생각하니 마귀에 사로잡혀 남편과 시댁 식구들과 싸우느라 힘들게 보내다가 죽을 지경이 되니 다시 교회를 찾게 되고 ‘말씀대로 믿고 살고 누리고’라는 비전의 우리들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남편은 예배는 드리지 않았지만 기꺼이 아이들과 저를 태워다 주었습니다. 가정이 깨지기 직전이었는데, ‘가정아 살아나라’는 말씀으로 가정의 소중함을 강조하시는 목사님 말씀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휘문고등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교인들이 늘어 판교에 예배당을 짓게 되었고, 예배당은 그야말로 현대식으로 식당, 카페 등 편리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좋았는데, 큰 예배당에 비해 300석밖에 안되는 주차 공간으로 외지에서 오는 많은 교인분들은 멀리 다른 주차장을 이용하거나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BMW(Bus, Metro, Walk)를 이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이 둘을 데리고 그렇게 다닌 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일에는 차를 가지고 갈 수 밖에 없었고, 수요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오며가며 3시간을 버스를 타고 가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느 순간부터 무슨 프로그램들이 넘쳐나더니 제 생각에는 교회를 다니는 건지 문화센터를 다니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다시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처음 신앙에 눈을 떴던,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던 그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석사 공부를 하지 않는 이상 아이 둘을 데리고 미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미국 옆나라 캐나다에 가면 미국에 자주 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미국을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캐나다에 왔습니다. 캐나다는 미국과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느새 사춘기로 접어들고 더욱더 힘들어졌습니다. 제대로 된 한인 교회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의 한인교회에 나가기로 작정하고 나갔습니다.

시니어 봉사팀과 구역에도 속하여 모임에 나갔고, 인간적으로 너무 좋으신 분들이지만 세속적인 모임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코비드가 발생하며 현장 예배 대신 유튜브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HOLY TUBE라는 채널을 알게 되어 2월부터 40일 기도회를 5회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4회 기도회부터 데이비드 차 선교사님의 방언 기도를 사모하라는 말씀을 들으며 진짜 이번에는 방언 은사를 받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던 찰라에 김경환 목사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시대와 인물들을 분별하고 그 때마다 주신 말씀도 분별해야 한다면서 지금의 방언과 표적은 거짓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성경 말씀으로 알려주시니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행위 구원이 아닌 은혜 구원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당장 HOLY TUBE 기도회를 멈추고 김경환 목사님 말씀을 계속해서 듣다가 “원거리 사역팀에 꼭 연락하세요~” 라고 말씀하셔서 12월 4일 바로 전화드렸고, 목사님께서는 로마서 10장 9절 말씀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말씀으로 은혜 구원을 확인시켜 주셨고, 영접 기도를 따라하여 주님을 영접하고 드디어 은혜 구원을 받았습니다.

Dr. Gene Kim 목사님 채널도 말씀해주셔서 구독을 하고 들어보니 정말 기가막히게 김경환 목사님의 영어 버전이었습니다. 내 교회의 부흥이 아니라 이 한국 민족의 구원을 위해, 더 큰 사역을 위해 힘쓰라는 목사님의 설교는 더이상 증명할 필요도 없는 진실성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제가 사는 곳 근처에는 인디펜던트(독립) 바이블 빌리빙 교회가 없어서 너무 당혹스러웠으나, 있다고 한들 현재로서는 코비드로 현장 예배가 불가능하기에 지금은 김경환 목사님 설교 말씀 들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원거리 사역 김주연 형제님께서 애써 보내주신 책자와 전도지를 저부터 꼼꼼히 공부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은혜 복음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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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문순정

2021.12.09 11:17:13

어려운 이야기를 오픈해주신 형제님의 간증에 감사드립니다. 어린 시절부터 한으로 남아있는 악한 환경, 악한 마음에 대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애증처럼 가지고 살게 되고, 정말 지긋지긋한 세상 거짓말에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 교회인데, 교인 각자의 구원이나 신앙, 심지어 마음의 위로 따위도 개의하지 않고 그저 파리 꼬뮌과 같은 가공의 공동체만 만들어 동원시키는 모습들에 많은 사람들이 더 큰 상처를 받습니다. 종당에는 교회 가기 전 보다 비참하고 이 세상에 진리는 없다는 우울감에 빠지지요..

저도 이제 겨우 원거리 사역자님의 도움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생존자에 불과하고, 형제님께 감히 위로 드릴 처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황과 마음을 가장 잘 아시고, 무엇보다 거짓된 종교생활이 아닌, 내 안에 있는 간절함을 하나님께 소상히 말씀 드릴 때, 주님께서는 틀림없이 그 마음을 아시고 진리에 대한 순수한 사모함에 응답해주셨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문화센터??인지 야시장인지 헷갈리게 하는 종교시설의 난립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기형적으로 만들어 그들보다 두 배나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든다는 점. 그렇지 않아도 세상과 교회 사이에는 이렇게나 깊은 골이 있는데, 하나님을 간구하는 순수한 사람들 마저도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데에 그 누구도 아닌 기독교의 이름을 건 자들이 앞장선다는데에 가슴이 아픕니다. 저는 부족한 사람이지만 이 비진리의 세상속에도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싶어하는 많은 잠들어있는 혼들의 구원을 위해 더욱 양육받고 연단받겠습니다. 간증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